影印本(木板本). - 서울 : 景仁文化社, 1996. - 【韓國歷代文集叢書(1647-1650)】.
4冊 : 23 cm.
조선 후기의 학자인 류심춘의 시문집이다. 류심춘은 10세에 내형(內兄) 조목수(趙沐洙), 조학 수(趙學洙)에게 수학하여 덕업을 스스로 세웠다. 18세에 향해에 장원하였으며 25세에 생원 복시(生員覆試)에합격하고 27세에 정종로의 문하에 나아가 위기지학에 더욱 정진하니 당시 에 독학군자(篤行君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1795(정조 19)년 예조참판 이익운(李益運)과 좌 승지 임제원(林濟遠)이공의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를 왕에게 천거하니 왕이 전벽(殿壁)을돌아보며 “류심춘의 이름은 익숙하게 듣고 기록해 두었다.”하고구전으로 돈용교위용양위부 사용(敦勇校尉龍驤衛副司勇)을 특명하였으며다음해 2월에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를 제수하였다가 다음날 장사랑․효릉(孝陵) 참봉을 제수하였다.
1797년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어 교숙(校塾)을 수축하여 유학을 부흥시키고 향약을 만들어 풍속을 바로잡았다. 1798년통훈대부에 승자(陞資)되고 원자궁(元子宮) 강학청(講學廳)의 요속 (僚屬)에 선발되어청양현감(靑陽縣監)으로 전임되었다. 1800년 정월 원자(元子)의관례(冠禮) 와 책례(冊禮)를 병행함에 특명으로 어모장군세자익위사우익위(禦侮將軍世子翊衛司右翊衛)가 되었으며 181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제수 받고, 다음해 4월세자 책봉 때 다시 익위 사좌익찬이 되어 6월의 동궁상견례(東宮相見禮)와 7월의 책례(冊禮)에 참여하였다.
1815년에 의성현령이 되었다가 익년 7월에 사임하였으며, 1829년 왕세손(王世孫 ; 헌종) 책례시(冊禮時) 위종사좌장사(衛從司左長史)를 제수 받았고 1830년 돈녕부도정에 승진되었다. 1832년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1841년에 청백리로 뽑히고, 1854(철종 4)년 아들 후조 (厚祚)가 급제하였으므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 1847년 도암서원(道巖書院)에 봉향되었다.
이 문집은 서문과발문이 없어 간기는 자세하지 않다. 문집 중 시는 호방하면서도 물외의 한가함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자술(自述)」에서는장주(莊周)의 호대한 사상을 숭배하여 자신도 구만리장천을나는 대붕이 되기를 갈구하였다. 소(疏) 중 「동궁보익편(東宮輔翼篇)」은 69세의 고령으로 왕세손의 위종사좌장사(衛從司左長史)의 직에 있을 때 올린 것으로, 동궁은 왕이 될 고귀한 신분이므로어릴 때부터 지선하고 고귀하게 부익하지 아니하면 성군이 되는 자질에 결함이 생긴다고 지적하면서, 옛날성현들의 격언이나 가모(嘉謨)를 인용하여 보도(輔 導)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서(書)는 250편에 달하는방대한 양으로 저자의 학문․사상․언행 의 집성이라 할 수 있는데, 「상입재서(上立齋書)」는 정종로에게 올린 글이며, 「상강재서(上剛 齋書)」는송치규(宋穉圭)에게 올린 것으로, 정치․경제․시사․성리․예설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주서차의」는 『주자대전(朱子大全)』중에서 의심나는부분을 뽑아 그 아래에 선유들의 설을 인용하여 입증, 해석하고, 이따금자신의 소견을 첨가하거나 알기 쉽게 풀이하여 후학의 주자학 연구에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청무강의(靑武講義)」는 상주의 청무 서당에서 강의한 내용인 사서에 대한 자료를정리한 것으로, 『중용』의 인심과 도심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명록(自銘錄)」은공부하면서 수양에 관한 자료를 수 집하여 그 중에서 자기가 평생에 실천하고 지켜야 할 부분을 기록한 것으로 행동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이밖에 「응지소(應旨疏)」는『중용』에서 말한 지(智)․인(仁)․용(勇)을 들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라고 강조하고, 환정(還政)․양역(良役)․전정(田政)․적정(籍政)․ 판염(販鹽)․노비 등의 시폐를 조항별로 들어 개선책을 진언한 것이다.